캐비넷 깊숙한 곳에서 보라성이 창립된지 얼마안되었을 때.. 80년대의 날적이를 발견한다.
그래! 내가 대학 3학년이 될 때가지만해도, 동아리방이나, 학과 사무실에도 날적이라는게 있었다.
요즘 애들은 '날적이'라는 말과 쓰임새를 알까 모르겠네.
그나저나, 80년대의 날적이를 2006년인 지금에도 동아리방에 잘 보존되고 있다니 신기한 느낌이다.
오래된 날적이.
맨 앞에 그때 활동했던 대 선배님들의 이름들이 적혀있다.
자랑스런 우리의 선배님들의.




'빛바랜'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걸거다.
20년뒤에 꺼내본 20년 전의 오래된 날적이 종이 한장 한장은 그야말로 빛이 바래서 시험지 같은 느낌이 든다.
80년대 중반의 어느날에 쓰여진 선배들의 일기를 읽어본다.
선배들이 어느 공장에서 며칠째 파업 철야 농성을 진행하다가,
잠시 선배들이 학교에 다니러 온 사이 대규모 공권력과 구사대가 들이닥쳐 동지들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노동자들과 끝까지 연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신을 질책하는 내용....
엄혹했던 그 80년대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내용....
우리 선배들은 그렇게 세상과 싸우기 위해 보라성이라는 공간을 만들었을테지.
날적이가 우리 보라성의 역사 그 자체가 된다.
겹겹이 쌓여 빛바랜 날적이 처럼, 우리 보라성에게 20년이라는 시간이 쌓여 있다.
별것 아닌 오래된 날적이지만, 20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온다.
더더군다나 우리는 그 20년이라는 시간을 과거로만 묻어두지 않고,
대선배님들과의 만남을 지속시켜 오고 있지 않은가!
보라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선후배들이 서로의 삶에 거울이 되어주는 보라성.
보라성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빛바랜 흑백사진 앨범도 있다.
지금은 서른 중반, 마흔이 된 선배님들의 앳된 모습들.
선배들도 이렇게 귀여운 때가 있었구나!

20년 전의 시간에서 10년전으로시간을 건너와 본다.
키보드와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만 노래를 하던 보라성이 드럼, 일렉기타, 베이스, 신디사이저 등의 악기를 갖추게 된건 1996년.
내가 학교에 들어오기 2년전이다.
그때부터 악기 주자들의 사진을 악기들에 붙이기 시작했다.
첫번째 드럼 주자, 인석형, 세번째 드럼주자 미현.

두번째 드럼주자, 종찬형, 네번째 드럼주자 선규.

첫번째 베이스 주자, 종아선배, 두번째 베이스 주자 진권형, 세번째 베이스 주자 나.
졸업할 때 내사진을 못 붙이고 졸업해, 사진찍기 전에 붙인 사진.ㅋㅋ

동방 창문에 우리 동아리 모토가 색지로 붙여져 있던 자리.
바깥쪽에서 볼수 있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안에서 보면 거꾸로다.
분명 내가 졸업할 때만해도 모든 글자들이 제대로 붙여져 있었는데,
내가 졸업한 5년 동안 비바람이 얼마나 몰아쳤길래 다 떨어지고 없는 건지....
15년동안 붙여져 있어서 그랬던지 유리에 선연하게 자국이 남아 있다.
'고난의 함성, 노동해방의 함성, 보라성'
유리에 선연하게 새겨진 흔적처럼, 내 삶에 선연하게 새겨진 보라성에서의 시간들.